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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플라톤 ‘국가’ 추가 정리
    국가에서 최대로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과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에 대해 플라톤은
    욕구는 절제하고 기개는 용기가 있고 이성은 지혜가 있으면 된다고 했고,
    국가에서 생산자는 욕구를 절제하고 수호자는 기개에 용기있고 통치자는 이성이 지혜로워야 한다고 했다.
    그럼 국가가 최대로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길과 사람이 불행해지는 길은
    욕구는 끝없이 추구하고 기개는 감추고 숨기고 드러내지 않고 없애고 이성은 지혜가 없으면 되고,
    국가에서 생산자는 욕구를 끝없이 충족하고 수호자는 기개를 드러내지 않고 누가 기개를 드러내면 공격하고 통치자는 지혜와 담을 쌓으면 된다.
    욕구를 추구하는 일은 받는 일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것은 좌파라고 했다. 우뇌가 하는 일이고 감성적이다.
    받는 일에 대해 긍정하는 태도는 좋다. 단지 받을 때 주는 대상을 높고 뛰어나고 빛나고 탁월하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플라톤이 한 비유를 들자면 해가 질 때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무엇이든 변하는 과정은 아름답다. 따라서 해가 있다가 해가 지는 순간은 아름답다. 이것이 원형이다. 즉 이데아다. 이데아가 가장 아름답다.
    그것을 내가 본다고 하자 내가 볼 때는 내 몸과 마음 상태에 따라 같은 모습도 다양하게 보인다. 즉 그 해지는 모습을 나는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고 아무 의미없이 느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아름답다고 여겼다고 치자. 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이데아에 비해서 덜 아름답다. 왜냐하면 이데아 전체를 다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변하는 과정 전체를 온전히 내가 다 알아차릴 수도 느낄 수가 없다. 알아차리지 못한 것 느끼지 못한 것만큼 아름다움은 줄어든다. 물론 이렇게 볼 수도 있다. 나란 개인과 해지는 광경이 함께 만나 즉 서로 기대어서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는 일이다.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낀 그 부분은 개인 안에서 순수하게 존재한다. 순수하게 존재할 때가 바로 물아일체인 상태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문자로 개념을 잡는 순간 물아일체는 깨진다. 순수하게 존재한 것을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화가 된 것은 순수하게 존재한 것을 다 담을 수가 없다. 아름다움 광경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나와 경치가 만나 나타나는 순수한 것은 이데아라고 할 만하고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이데아에서 조금 벗어난 것이다.
    이런 내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자. 사진기에 따라 사진을 인쇄하는 방법에 따라 사진은 다양하게 나온다. 이 사진은 해지는 광경을 다 담을 수 없다. 따라서 이데아에 비해서 덜 아름답다. 그렇지만 이 또한 가장 이데아스러운 것은 필름에 남겨진 것이리라. 필름에 남겨진 것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이데아를 조금씩 잃어갈 것이다.
    사진보다 이데아에서 더 멀어진 것이 그림일 것이다.
    사람도 저마다 해지는 광경을 볼 때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무의미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사진도 사진을 찍는 사람에 따라 잘 찍을 수도 있고 엉망으로 찍을 수도 있다. 그림도 같다. 잘 그릴 수도 있고 엉망으로 그릴 수도 있다.
    이데아를 가장 많이 담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것이다.
    사람이 해지는 광경을 보면서 가장 많은 것을 담은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사진을 찍을 때도 그러하고 그림을 그릴 때도 그러하다.
    즉 받을 때는 대상이 뛰어나고 탁월하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대상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이 물아일체다. 생각을 벗어난 것. 사고를 벗어난 것. 개념화하지 않은 것.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는 것. 이것이 어떤 것을 받을 때 가장 좋은 것이다. 누구와 이야기를 하든 어떤 노래를 듣든 춤을 추든 책을 읽든 해지는 광경을 보든…
    이렇게 받아들이다 보면 처음에는 놓지는 것이 많다. 하지만 반복되다 보면 하나하나 더 잘 보이게 더 잘 알게 된다. 이것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러다가 익숙해져서 더 이상 잘 볼 것도 잘 알 것도 별로 없는 순간이 오면 일단 그것을 떠나는 게 좋다. 그렇게 떠나서 다른 많은 것을 경험하고 나서 다시 그것과 마주하게 되면 그 동안 잊어버린 것도 있기 때문에 새로운 느낌이 난다. 또한 중요한 점은 그 동안 다른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식은 지혜는 눈굴리기와 같다고 했다. 다른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내가 떠난 던 것을 더 잘 알고 더 잘 보게 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발전이 없다 싶으면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되더라도 일단 떠나서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게 좋다.
    그럼 행복하지 못하게 되는 길은?
    먼저 받았을 때 대상을 별 것 아니라거나 하찮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받는다는 것은 대상에게서 자극을 받는 일이다. 자극을 받는 일은 새로운 일이다. 새로운 일은 내게 없는 일이다. 내게 없는 일을 내가 자극을 받아 반응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내가 상대보다 그 일로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알고 더 능숙한 사람이 더 뛰어난 사람이지 그 일에 대해 잘 모르고 경험이 적고 서툰 사람이 더 뛰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받는 쪽이 뛰어난 쪽이고 높은 쪽이고 이기는 쪽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받는 일은 어떤 현상일까? 받을 때 주는 대상을 하찮게 여기고 진다고 여기고 낮은 쪽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주는 대상에게 관심이 없다. 주는 대상에게 자극을 받을 수는 없다. 여기서 주는 대상이라면 요리사나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기자다.
    받는 쪽이 이기는 쪽이라고 여기면 받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이기는 쪽이라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주는 대상을 진다고 낮은 쪽이라고 하찮은 쪽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주는 대상에게 자극받을 수는 없다. 따라서 요리사에게 자극받을 수는 없고 요리에 자극을 받는다. 부모님에게 자극받을 수는 없고 부모님이 주신 것에 자극받는다. 선생님에게 자극받을 수는 없고 선생님이 준 것에 자극받을 수 있다. 기자에게 자극받을 수는 없고 기사에 자극받는다.
    나보다 더 높다고 여길 가능성이 있는 생명에게는 자극받을 수 없고 나보다 낮은 게 명확한 생명이나 무생명에게 자극받는다.
    모든 뛰어난 건 주는 쪽이다. 따라서 하찮아야 한다. 받는 쪽이 높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모든 받는 것은 높아야 하고 소중하고 귀해야 한다. 그래서 서툴고 약하고 어리석은 대상이 높고 소중하고 귀하고 선해야 한다.
    자기가 어떤 뛰어난 것을 내 놓는 일은 남들에게 주는 행위이고 그것은 자기가 남들을 대접하고 높이고 남들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댓가로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 하는 필요희생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받는 게 높다고 여기게 되면 될 수록 이데아와 멀어진다. 요리결과물에만 반응할 뿐 요리하는 과정과 요리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요리가 자기 앞에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자기 입과 눈과 코와 여러가지에서 요리가 일으키는 반응만이 중요할 뿐. 대상에 대한 관심은 없다. 이데아를 아는 것과 가장 멀어지는 것이다.
    자기 몸과 마음에 반응이 일어나면 그것은 자기가 대접받은 것이고 그것은 자기가 높고 자기가 이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승리감에 들뜨게 되고 또다른 자극을 받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대상을 알고 싶은 마음은 없다. 대상은 하찮은 것이다. 대상은 하찮지만 대상이 나를 자극하는 그 한도에서 대상은 가치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데아에서 멀어지는 것이 지혜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그럼 기개에서 용기가 사라지는 일은 무엇인가?
    기개란 자극에 대해 반응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관심이 가서 무엇인가 다가가고자 하는 기운이다.
    하지만 받는 게 높다고 여기는 마음이 강하면 이렇게 다가가는 일이 진다고 여기게 되고 따라서 자기가 무엇인가에 자극받아 반응하고 난 뒤에 자기를 자극한 대상에 관심이 가서 다가가는 일을 막게 된다. 다가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 그 대상은 자기가 자극을 받은 대상이다. 따라서 자기가 잘 모르는 대상이다. 잘 안다면 자극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다가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다가간다는 것은 능동적인 일이고 능동적인 일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도 담긴다. 따라서 용기를 내기 어렵다.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다가가지 않는다.
    두 가지 면이란 자기보다 못하다고 보이는 대상이 일을 엉터리로 할 때 그것에 대해 자기는 자극을 받는다. 즉 저 사람이 일을 엉터리로 처리하고 있구나라고… 그렇지만 거기까지다. 그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자기는 자극받은 자체로 이긴것이다. 자기가 높은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가가서 지적한다고 해 봤자 상대가 좋아할 리도 없고 또 자기가 논쟁에서 질 수도 있다.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극을 받은 것으로 벌써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나아보이는 대상이 일을 잘 처리하는 것으로 보일 때 그것에 대해서 자기가 받기만 하면 된다. 상대는 내게 아첨하고 아부하기 위해서 저렇게 한 것이다. 다가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괜히 다가가서 이야기하면 내가 잘 모르는 것만 보여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자기는 아무 말 안하고 그것을 받으며 자기가 높다는 자기는 대접받는다는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이다. 뭐 받는 게 높고 받는 게 이기는 일인데 굳이 대상에 다가갈 이유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내부에 무엇인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감추거나 숨기거나 없앤다.
    일본인은 속마음과 겉모습이 있다고 하지 않나! 그와 같은 것이다.
    다가가지 않으면 실상을 알 수가 없다. 조선 말기 상황을 다가가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조선 왕은 대다수가 맛간 깡패 두목이고 신하는 그 깡패두목에 아부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고 그러면서 자기들은 백성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한다는 착각 속 성인군자들이고 실상은 온갖 수탈은 다 하면서 백성을 하찮게 보려는 마음만 가득한 사람들이다.
    물론 간혹 실상에 많이 다가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고 뛰어나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다.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고 기개에 용기가 없으면 지혜는 자랄 수 없다.
    지혜가 자라지 못하면 일은 엉터리로 진행되고 엉터리로 진행된만큼 나라든 국가든 약해진다. 약해진만큼 선함도 없고 뛰어남도 없고 빛남도 없고 가치도 없다. 약해진만큼 행복도 줄어든다.

  2. [조우석 칼럼] ‘문제적 인물’ 윤치호와의 가상대화 를 읽고
    윤치호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나무위키와 위키백과를 찾아봤다.
    나무위키는 좌파애가 마구잡이로 써놔서 가져온 윤치호가 한 말만 읽고, 위키백과를 봤는데 글이 참 길다. 다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가장 남는 말은 “愛民太過”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그를 시기하던 관리들이 그를 흠잡기 위해 감사를 파견했는데 그 감사가 지방민들이 그를 존중하자 이것을 죄라고 한 것이다. 즉 “백성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나라에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지방관이 백성을 사랑하는 일이야 특별할 건 없다. 단지 그것이 결국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사람들 눈에 좋지 않게 보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즉 백성을 너무 사랑하는 행동은 백성들에게 나라가 없어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리라.
    이 생각은 나라는 백성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고 백성은 나라를 떠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리라.
    이 당시 조선 국왕과 관리들 사고방식을 알 만한 대목이다.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어떻게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국가가 발전하겠는가!
    사람들 속에서 이런 죄목으로 지방관 자리를 파면한 것은 너무했다는 말이 많아서 나중에 다시 지방관 자리에 복귀했다.
    자기가 그 사람 수준이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
    우리사회에서 누가 윤치호를 평가할 수 있겠는가?
    어려서부터 천재라고 하고 나이 들어서도 잠이 적었다고 하는데… 잠이 적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깨어있는 시간이 맑고 밝았고 자는 시간에 깊은 잠을 잤기 때문이리라. 꿈을 거의 꾸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나 또한 나보다 더 맑은 정신으로 살아간 듯한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
    물론 나보다 더 낫다 말하진 않는다.
    살아간 시대가 다르고 장소가 다르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윤치호가 한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일이다.
    윤치호는 아주 명확하게 주는 마음이다. 완전한 우파다. 받는 마음이란 걸 모른다.
    받는 마음은 남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에 신경을 쓴다.
    일본 천황에게 학생들이 떡같은 것을 선물받은 후에 도랑에 버린 일에 대해 학생들을 꾸짓는다. 배고픈 사람이 많은데 왜 음식을 버리느냐고, 만약에 자신이 싫다면 선물을 받지 말아야 하고 받았으면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받는 것도 주위 눈치보기고 학생들이 버리는 것도 주위 눈치보기다. 이런 것이 없으니 꾸짓는 것이다.
    물론 윤치호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를 많이 안다. 하지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항상 더 나은 선택을 하고자 할 뿐이다.
    윤치호 삶에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실력을 키우는 것이다. 교육과 경제라고 할 만하다.
    윤치호는 “스페인 일본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는 간디같은 인물을 영웅이 되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한다. “간디같은 인물이 영웅이 되게 놔둔 게 위대함이다”고 말한다.
    국가를 알기는 참 어렵다. 그런데 스페인 일본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이 시대가 많은 것을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보고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다.
    앞에 플라톤을 말했지만 이데아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끝없이 대상에 다가가야 한다. 그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윤치호에게 부족한 점이라면 받고자 하는 욕망이 없을테니 받고자 하는 마음을 알기 어려웠을테고 따라서 받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오염되지 않았기에 맑고 깨끗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뭐 내가 이런 말 할 수 있나 싶기도 하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잠이 많고 정신은 맑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일까?
    날 변명한다면 나 또한 받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는 점이고 따라서 남이 날 어떻게 보는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단지 난 받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알고자 했다.
    또다른 변명이라면 윤치호가 살았던 시대는 언제든 죽을 수도 있고 감옥갈 수도 있는 조선말과 일제치하다. 따라서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기 어려운 시대다. 지금 시대는 게으르게 살 수 있는 시대다.
    플라톤이나 윤치호나 둘 다 여성교육에 의문을 가졌는데,
    지금 시대에는 의문을 가질 이유는 없다. 남성도 충분히 받고자 하는 욕망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받고자 하는 욕망만 가득한 사람에게 교육은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교육이 전혀 안되기 때문이다. 훈련만 될 뿐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만 가능할 뿐 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내가 관심갖는 것은 어떻게 하면 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로 관심을 돌리는가이다. 즉 받는 마음에서 주는 마음으로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가 내 관심이다. 그 전에는 교육이 되지 않고 교육이 되지 않으면 실력양성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는 온갖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에 그 시스템을 따라서 반응만 하는 사람들이 가득해도 경제적으로 어느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이 수준이 된다고 할 수 없다.
    개개인 수준이 낮으면 개개인은 행복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는 워낙 다양한 것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것에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스스로 아무리 수준 낮고 싶어도 어느정도 수준은 있게 된다. 현대는 그정도다.
    ‘애민태과’라는 말로 시작했다.
    윤치호는 언제나 우리나라가 우리국민이 더 뛰어나길 바랬다. 그렇기에 뛰어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마음이 안 좋았다.
    조선 말 당시 국왕이나 관리는 우리 국민이 더 뛰어나길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이상한 죄목으로 파면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더 뛰어나게 되길 바라고, 또한 자기 주위 사람들이 더 뛰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옳은 마음이다.
    스스로 자신을 더 뛰어나게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망치고 있고, 또한 자기 주위 사람들이 더 뛰어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은 자기 주위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자신 또한 망치고 있는 사람이다.
    윤치호가 해방 후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독립을 이룬 것처럼 날뛰는 것을 보면서 보기 싫어했듯이. 우리 자신이 한 것이 없는데 주어진 독립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듯이.
    지금 우리는 현재 우리가 이룬 것들에 대해 아무런 고마워하는 마음없이 민주주의니 평등이니 외치면서 날뛰는 것이 보기 좋지 않다. 먼저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