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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헌재 판결 이후로 큰 실망감에 글을 쓰지 않다가 오랜만에 글을 쓰네요. 그 동안 여기도 많이 바뀌었네요.
    만약에 글을 쓴다면 여기에 쓰는게 아니라 유튜브 동영상에 댓글을 다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저는 그래도 여기에 계속 달아왔으니 여기에 답니다.
    기생충 이야기가 나와서 이애란 박사님 김정은 쪽을 향해서 기생충과 같다고 하셨는데 그렇겠죠.
    최근에 든 생각은 잘못되면 좌익이나 우익이나 결국 서로 갖고 있는 공통점이 사회를 나쁜 쪽으로 몰아간다고 봅니다.
    좌익은 SM에서 M 우익은 S 결국 둘 다 변태죠. 세상을 꺼꾸러 알고 그렇게 받아들이기에 그것밖에 보이지 않아서 자기가 아는 세상에 갇혀서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속에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먼저 M이라는 좌익을 알아봐요.
    세상에 태어나면 어려서 무엇이든 받고 보살핌을 받습니다. 받는데 익숙해지는데 자기한테 잘해주는 모든 것을 아부로 봅니다. 그래서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지요. 부모도 자기한테 아부하고 연예인들도 노래도 가전제품도 모두 다 자기한테 아부하는 것들로 보는 것이죠. 다 자기 밑이라고 받아들이죠.
    받는 쪽이 지위가 높은 쪽이다. 이기는 쪽이라고 살아가죠. 그래서 연애도 절대로 먼저 다가가지 못합니다. 다가가는 쪽이 진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자기가 자극을 받는 쪽인데 상대가 자기한테 아부하는 것이 분명히 아닌데 자기보다 높아 보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뛰어난 사람인데 아부하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죠. 이런 사람들은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받는 쪽이 높은 쪽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어긋나기 때문에 가만히 놓아둘 수 없죠. 그래서 어떻게든 험담을 하거나 뒷담화를 깝니다. 시기니 질투니 하는 말을 쓰죠. 이렇게 험담을 하거나 뒷담화를 까는 대상은 반드시 자기가 뭔가 상대한테 뒤진다는 느낌이 드는 대상에게만 향합니다. 없어보이는 사람을 까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는 마음은 없습니다. 모든 주는듯한 행동은 받기위해 하는 행동입니다. 결국 아부죠. 받을 게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에게는 아부를 합니다. 그게 자기한테 좋다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 관심은 돈과 권력과 지위 즉 받을 수 있는 수단을 가지는 것입니다. 돈이 제일 편하고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같은 것도 무엇인가를 받기위한 도구죠. 개인적인 능력은 모두 수단입니다.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받을 수 있나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앞에 잘못되면 좌익이나 우익이나 공통점을 가진다고 했는데 그 공통점이 뭘까요?
    바로 자기를 높이기 위해 어떤 대상이든 하찮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럼 좌익은 왜 M이 될까요?
    왜 S에 꼼짝을 못하고 S에 열광을 하게 될까요?
    자기를 하찮게 대하고 하찮게 만드는 S에 속박당하게 될까요?
    우리 남한 속 삶에서 남을 하찮게 대하는 태도를 겪는 일은 극히 드물죠.
    따라서 대다수 받는 게 높다고 여기며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자기가 높다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자기 주위 모든 사람들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면서 살아가죠. 이것이 흔들릴 일은 거의 없죠.
    하지만 자기도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남들에게 잘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그것은 받기위해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꺼려질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자기가 최고라는 인식을 얻기를 바라고 그런 인식은 자기가 최고이니 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을 드러내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게 마음에 쌓여있게 되죠.
    여기에서 남을 하찮게 대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즉 자기한테 잘해주는 모든 것은 자기한테 아부하는 행동이 맞다는 것이죠.
    부모님이 자기한테 잘해주는 건 부모님이 자기보다 낮아서 자기한테 아부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하찮게 대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긍정하는 태도를 갖게 만듭니다.
    만약에 하찮게 대하는 행동을 부정하게 되면 대상에게 잘해주는 행동을 긍정해야 하고 그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사회나 부모나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온 모든 삶이 자기가 나약하고 서툴고 어리고 모르기 때문에 받아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찮게 대하는 것에 대해 끌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찮게 대하는 것이 바로 S입니다.
    바로 몇몇 소수 S를 높임으로 해서 그동안 자기한테 도움이 되었던 모든 것이 자기보다 아래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이죠.
    사실 이런 M은 받기만 하기때문에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당연히 모든 일은 자기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기는 반응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해 책임감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자기를 귀하게 대하고 높이면 자기는 그것에 반응해서 자기가 귀하고 높다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귀하게 대하고 높인 대상은 하찮다고 여기게 됩니다. 상대가 자기를 하찮게 대하고 낮추며 대하면 자기는 하찮고 낮은 존재고 상대는 높다고 여기게 됩니다.
    북한은 여자를 하찮게 대합니다. 따라서 북한 여자는 남자를 높다고 여깁니다. 일본은 여자를 낮게 대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높다고 여깁니다.
    남한은 여자를 높이 대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낮다고 여깁니다. 이런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실 남한은 혼동되었는데 어찌되었든 자기를 높이는 남자를 하찮게 여기고 자기를 하찮게 대하는 남자를 높다고 여기는 게 일반적입니다.
    M이 받는다는데 좀 더 중점을 두었다면 S는 대상을 하찮게 대한다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둘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이것과 반대는 주는 행동을 높이 보는 경우죠. 대상을 귀하게 대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죠.
    우리 사회를 보면 정말 앞이 깜깜합니다.
    성경에 세상은 홍수가 나서 거의 다 죽습니다.
    즉 물이 세상에 넘쳐나면 세상을 다 익사시켜 버리죠.
    이 물이란 게 받기만을 바라며 받는 게 높다는 인식 속에서 시기와 질투 속에서 주는 마음을 모르니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이익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온 생명을 다 바치며 모두가 혼자라는 고독 속에서 혼자가 아니길 바라며 손을 뻗히지만 그 손이 가는 곳은 자기를 하찮게 대하는 악으로만 뻗히게 되지요.
    우리 사회는 물이 가득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사회를 살아갈까요? 나무가 되어야겠죠. 노아의 방주는 나무로 되어있죠. 나무는 물에 뜹니다. 나무란 균형잡힌 삶이죠. 주는 게 높니 받는 게 높니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 나무죠. 주는 게 높다는 불이 될 수는 없죠. 물이 극성한 곳에서는 불은 금방 꺼져 버립니다. 주어도 주어도 한정이 없거든요. 받으려는 욕심에 가득차서 더 받으려 달려들기 때문이죠.
    나무란 먼저 키스할 수도 또는 키스당할 수 있다 여기고 둘은 같은 위치로 봅니다. 안아주는 것과 안기는 것을 둘 다 가능한 것이고 누가 위라거나 높다거나 강하다거나 여기지 않아요. 애교를 하는 것과 애교를 받는 것을 둘 다 스스로 가능하다고 여기고 어느 쪽이 높다거나 낮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무죠. 이렇게 살면 물이 극성한 곳에서도 물 위에 떠서 살아갈 수 있죠.
    그렇지만 물 위에 떠서 살아가면서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바로 발을 딛고 한 곳에 서 있을 수 있는 땅입니다. 흙이죠. 흙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물이 올바른 태도를 가졌다면 흙이 될 이유는 없습니다. 물을 북돋워 주어야 겠죠. 그것이 쇠(바람)입니다. 물이 올바른 태도를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받을 때 상대를 높이보고 상대에게 고마워하고 그것을 은혜로 여기고 그것을 언제가는 갚고 싶어하고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대상을 존경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물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그런 사람을 긍정해야 겠죠. 긍정하는 태도를 갖는 금이 되는 것이죠.
    지금 우리 사회는 잘못된 물이 가득한 사회입니다. 이것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태도는 흙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물에 유혹되지 않고 자극받지 않고 그것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태도를 가지는 것 그래야만 자기만의 땅 위에 스스로 설 수 있는 것이죠. 물을 멀리하는 것이 흙이요. 살아가다 보면 멀리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나무가 되어서 이기고 진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주고받음이 자유로운 삶을 살면 잘못된 물 속에 살아도 그 속에 빠져 숨을 못 쉬진 않을 수 있죠.
    오랜 만에 긴 글 지난 글 속에서도 밝힌 것들이지만 다시 한 번 써 봅니다.

  2. 아 조금 더 덧붙여 이야기하면,
    sm은 둘 다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요.
    M은 자극받기를 원하고 그것에 반응하기를 원하죠. 몸이 활동하는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S는 대상을 하찮게 한다고 해서 대상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죠. 자신이 대상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또는 스스로에게든 자신이 뛰어나다는 강하다는 인상을 받기를 바라죠. 결국 가학이든 피학이든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일합니다. 모두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죠.
    그럼 앞 글에서 언급한 올바른 물은 무엇인가를 받으면 대상을 높이보고 대상을 존경하고 은혜를 받았다 여기고 고마워하고 나중에 보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렇게 받을 때 관심은 자신일까요? 대상일까요? 오로지 대상에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자기는 잊혀지지요. 대상만이 자기한테 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대상에게든 또는 다른 것에게로든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즉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죠.
    잘못된 불이 바로 가학인데,
    올바른 불은 주고 싶은 마음이죠. 상대가 더 뛰어나고 빛나고 보기 좋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것 저것 상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주는 행동이 바로 올바른 불이 하는 행동입니다. 이 때 물론 관심은 대상입니다. 자기는 그 속에 없습니다. 오로지 상대만이 남습니다. 상대가 어떻게 되는가에만 관심이 갖게 됩니다.
    SM은 변태죠. 세상을 꺼꾸로 보는 것이죠. 올바른 물과 불은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죠. 변태가 아니라 정상이죠.
    정상보다 변태가 많은 사회는 정상이 변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변태가 정상처럼 보일 수 있죠. ^^;
    뭐 삶이란 게 모든 순간을 자기를 잊고 대상에게만 관심을 갖고 사는 게 좋은 건 아니겠죠.
    자기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때도 있고 대상에게 관심을 가질 때도 있는 게 삶이겠죠.
    따라서 이렇게 말하면 사실 변태도 정상도 어디 있을까요? 모든 게 삶이 되겠죠.
    단지 다른 것도 보고 알고 겪고 난 뒤에 자기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각자에게 생긴다면 좋은 일 아닐까요?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자기를 잊고 상대에게 온 관심이 다 가는 순간을 겪어 보는 것이 좋고 대상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자기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을 가지게 되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네요.
    무엇이 옳다 그르다가 사라졌나요?
    행복이 옳습니다.
    행복은 무엇일까요?
    행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입니다. 마음이 들뜨는 것이든 걷는 것이든 부끄러워하는 것이든 무엇이든…
    행복이 커지는 것이 옳은 것이고 행복이 작아지는 것이 그른 것이겠죠.
    더 건강한 삶이 더 행복한 삶이 되겠죠. 어떻게 하면 건강해질까요?
    다양한 자극을 서로 주고받는 사회가 되는 것. 그것이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옳은 사회가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