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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1. 제가 요즘 학교에 나가고 있어서 여기에 자주 글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학교에 나가면 학생들과 힘겨운 시간을 보네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수업이 되기를 희망하지만 그게 참 잘 안되네요.
    환상과 거짓에 빠지지 않고 진실을 아는 일. 그게 중요하겠죠.
    오랜 만에 글 남깁니다. ^ ^

  2. 극우든 극좌든 ‘극’이라는 말을 붙이기 위해서는 잘못된 것을 강제로 강요하는 게 있어야 한다.
    잘못된 것을 강제로 강요하는 것에 대한 대항은 전체주의가 아니라도 할 수 있다.
    페르시아가 쳐들어 올 때 그것에 대항해 여러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가 연합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다.
    페르시아는 전체주의 사회다. 따라서 자신들이 강할 때 그런 전체주의를 강제로 주위에 강요할 수 있다.
    그것이 잘못인지 아닌지 알 기는 어렵다.
    고대 로마는 전체주의일까? 아닐까?
    일단 로마가 확장할 때까지는 전체주의가 아니다.
    점령당한 지역도 로마시민권을 주었고 로마시민권을 가지면 가장 높은 자리에도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니발에게 연속해서 패해도 로마에 점령당했던 각 지역은 로마에 등 돌리지 않았다.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에게 패했을 때 페르시아에 점령당했던 각 지역이 페르시아에 등 돌렸던 것과 달랐다.
    페르시아는 전체주의 사회였기에 강요당했던 지역은 그 강요가 약해지자 등 돌린 것이다.
    그렇지만 한니발에 당하던 로마는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기에 등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도 말기가 되면 황제권이 강화되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군역을 지지 않으려 하면서 전체주의적인 성향으로 나아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올바른 일이라면 전체주의가 아니라도 각 개인은 그 일을 연합해서 한다.
    하지만 올바른 일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일은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가지지 않으면 그 일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극’자가 붙기 위해서는 전체주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극’자가 붙으면 올바른 지 아닌 지 알 수 없는 일을 주위에 강제로 강요하는 일을 하게 된다.
    올바른 사람은 전체주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올바른 것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일이란 것을 사람들이 알면 전체주의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그 일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일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위에 눈치를 보지 않는다.
    또한 자기가 한 생각과 자기가 한 일과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진다. 그것이 올바른 일을 믿는다는 걸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기자가 질문할 기회가 생겼을 때 질문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자신이 진실로 궁금한 점이 없고 자신이 그런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질문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사람이 다 하지 않고 있고 자기가 해야 할 위치가 되었다고 여겨진다면 그런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주위 눈치보기 보다는 자기 생각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에 기울지 않고 자기 생각에 대한 믿음이다.
    왜 우리사회는 전체주의에 기울게 될까?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체주의에 기울게 되었을까?
    왜 남 눈치보면서 자기생각을 말하지 못할까?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그것에 책임지는 경험을 많이 자주 했다면 그는 전체주의에 기울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릴 때 강제로 강요당해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일을 하지 못한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릴 때 부모가 다 해주어서 부모가 너무 아이에게 잘하려 해서 강요당하게 아니라 너무 심한 보살핌을 받아서 과보호를 받아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기회를 갖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한말 조선시대같은 전체주의적인 성향은 아니다. 그 당시는 강제로 강요당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양반에게 관리에게 모든 것을 뺏기는 일을 너무 많이 당해서 눈치보는 삶을 살게 된 것이고 지금은 뺏겼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이 받게 되어서 받는 것 밖에 모르는 그래서 눈치보는 삶을 사는 것이다.
    뺏겨서 눈치 보는 삶은 원한이 있고 그 속에는 복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받게 되어서 받는 것 밖에 모르는 그래서 눈치 보는 삶은 원한이라는 게 있기 어렵고 복수라는 것도 있기 어렵다. 단지 자기가 최고라는 착각과 그런 착각 속에서 올바른 일이 아닌 것을 잘못된 것을 전체주의에 기울어서 강제로 주위에 강요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 마음 속에는 원한과 복수가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최고라는 착각과 남보다 위라는 쾌감이 있다. 이 쾌감에 의존해서 일을 하게 된다.
    자기가 최고라는 착각이 깨진다면 전체주의적인 속성은 사라질 것이다. 스스로 올바른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전체주의적 의존으로 남에게 강요하는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올바른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일을 하는 것이 남보다 위라는 느낌을 가져와서 쾌감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냥 악마일 뿐이고 바보짓일 뿐이고 결국 아는 것 없는 열등감에 휘말려서 한 일 뿐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3. 병인양요때 프랑스 병사로 참가하면서 주로 그림을 그리면서 나중에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여행기 썼던 사람은 엄청나게 수탈하는 관리와 그것을 아주 관대하게 받아주는 일반 사람들이라고 쓰고 있다.
    수탈당하는 일반 사람들은 낮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고, 수탈하는 관리는 높은 지위에 있던 양반들이다.
    구한말 눈치보는 삶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뺏기기만 해서 눈치보는 삶을 강제로 살아야 했던 일반 사람들이고, 다른 한 가지는 받기만 해서 받는 것밖에는 모르는 그래서 눈치보는 삶을 사는 양반들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눈치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옛날 양반과 같은 심리상태이다.
    구한말 강제로 뺏겼던 일반 사람들은 여행기를 썼던 프랑스인 눈에 아주 관대하게 보였다고 한다.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은 준다는 시각에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원한과 복수가 마음 속에 있더라도 또한 관대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나름 우파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강제로 뺏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유의사에 따라 주는 일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기에 또는 책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를 키울 때 부모가 낮은 지위에 있기 때문에 강제로 아이에게 뺏기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보살피고 아이에 대한 책임으로 당연하게 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뺏긴다는 느낌을 가지기에 아이 가지기를 꺼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한말과 상황이 다르다.
    양반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강제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것을 뺏었다.
    지금 좌파는 높은 지위에 있지 않다. 강제로 뺏은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을 그냥 받은 것이다. 단지 받는 일에 익숙해지면 자기는 받기만 하면서 받는 게 높은 쪽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자기가 높다는 환상에 빠져있을 뿐이다.
    구한 말 일반 백성 또는 노비는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강제로 양반들에게 뺏겼다.
    지금 우파는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강제로 뺏긴 게 아니라 자기 자유의사에 따라 자부심을 갖고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사장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게 주인은 그 가게를 잘 운영하면서 가수는 노래를 잘 하면서 그렇게 잘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뺏기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하는 자랑스런 일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구한말 서양인이 테니스를 쳤다.
    그것을 본 양반이 한 말은 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 그렇게 힘든 일은 노비를 시켜라고 말했다.
    구한 말 양반 눈에는 어떤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자기 즐거움 자부심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봐야 한다.
    며칠 전에 점심을 먹고 5교시 수업이 없길래 비타민D 생성도 할 겸 운동장을 뛰었다. 약 50분 정도 뛴 것 같다.
    중간에 짧게 걷기도 했다. 4교시 수업도 없어서 점심을 좀 일찍 먹고 점심시간 모두를 뛰었다.
    뭐 나도 이렇게 운동장을 돌아본 게 92~93년 겨울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최근에 건강검진했는데 다른 건 정상으로 나왔는데 골밀도가 낮게 나왔기 때문에 햇빛을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선생님이나 학생들처럼 그냥 걷기만 하는 건 왠지 밋밋해 보여서 뛰었다.
    근데 이것을 엄청 이상하다는 듯한 억양으로 언급한 사람이 있었다. 아마 구한말에 양반이 테니스 치는 일에 대해 그런 힘든 일을 왜 하느냐는 식으로 본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점심시간이 되면 운동장이 가득 찼다. 그래서 삼삼오오 모여서 온갖 다양한 놀이를 즐겼다.
    제기로 야구하기 테니스공으로 야구하기 철봉에서 여러가지로 놀기 온갖 잡다한 놀이를 즐겼다. 점심은 점심시간에 먹는 게 아니라 그 전 쉬는 시간에 미리 까 먹고 점심시간 종 울리자 마자 운동장으로 거의 모든 학생이 다 나갔다.
    지금은 점심시간이 급식을 하기 때문에 사실 놀 시간 여유가 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논다는 개념이 별로 없다. 한다고 해봐야 정식 축구공이나 정식 야구공으로 장비를 갖춰서 한다.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서 노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우리 어릴 때는 모두 다 스스로 놀이를 만들었다. 그것이 딱지든 지우개든 무엇이든…
    어릴 때 많이 하던 땅따먹기(땅에 네모를 넓게 그리고 각자 구석에 한뼘정도 되게 둥글게 자기영역을 그리고 납작한 작은 돌을 세번 손가락으로 튕겨서 자기영역을 더 많이 확장하면 이기는 경기, 세번 튕겨서 안전하게 자기영역 속으로 돌멩이를 돌아오게 하면 보너스로 한뼘만큼 영역을 더 확장할 수 있다. 그래서 상대영역과 가까워지면 빈영역없이 상대영역과 접하게 된다.) 뭐 어릴 때 껌종이 따먹기도 했고 온갖 구슬로 하는 것도 했고 종이개구리 종이탱크 온갖 종이로 만든 것으로 놀기도 했다. 지금은 이렇게 스스로 무엇을 만드는 일을 아이들이 잘하지 못한다.
    사실 시대가 좋아져서 화려한 것들이 많아서 굳이 스스로 만들어서 할 필요가 없어지기도 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어찌되었든 지금은 구한말과 상황이 다르다.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는 자유시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받기만 하고 받는다는 시각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그 갇힌 곳에서 빠져나오게 만들 수 있는가이다.
    물론 준다는 생각만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받는다는 시각을 경험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