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면서

자유의 의미가 꾸준히 왜곡된 이래로 자유주의는 다양한 해석과 이견을 생산해왔다. 자유주의를 둘러싼 다툼은 물론 자유의 범위 – 각인의 자유는 도대체 어디까지 허용될 것이며,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가에 관한 생각 차이에서 오고 있다. 낙태는 허용될 것인가? 사형제도나 동성애, 인종 차별과 양성 평등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고,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다시 나누어 가지는 복지제도는 어떤 철학적 바탕에서 정당화되며, 각종 규제와 인허가, 면허제도, 중앙은행과 화폐독점, 금융, 의료 제도 등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정부 개입은 어떤 수준에서 어떤 이유로 그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을까…

자유에 대한 이 중요한 질문들에 답하기에 앞서, 많은 사람들은 ‘국가’를 하나의 주어진 조건으로 가정한다. 자유의 한계를 설정하는 주체로 – 그 한계에 대한 다른 생각은 관두더라도 – ‘국가’라는 추상, 혹은 그 구체적 등가물인 ‘정부’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상정되고 있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모든 국민국가에서 국가는, 제3의 공정한 관찰자요 판관이요, 어버이와 같아서, ‘국가라는 추상’ 앞에 이성은 한없이 나약해진다. 아무도 국가를 의심하지 않는다.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철학이 빈곤해지고 결론이 뒤틀리는 문제의 근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고 굳건하게 존재한다고 믿는 그 완고함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어 국가주의와 사회주의는 사실상 같은 종류의 망상이다. 아무개의 집 뒤뜰에 오늘도 자라나고 있는 5년생 잣나무는 있어도, 세상에 ‘나무’는 없다는 진실은 쉽게 인지되지 못하고 있다. 구체와 추상을 넘나드는 이 특별한 원숭이들의 독특한 능력은 위대한 문명을 가능하게 했지만, 지금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는 중이다.

자유주의는 인간에 대한 철학이지만 어느새 정치철학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자유보다 사회나 국가를 먼저 가정하는 인간들의 습관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독립된 하나의 사상체계가 아니라, 정치철학의 한 챕터 정도로 자유주의는 인식되고 있다.

자유주의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로부터 논리적으로 유도되는,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고는 도저히 반박되지 않는 단단한 생각으로, 인간 행동에 대한 분석은 자유주의 철학의 시작이다.

  1. 인간 행동

모든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피부를 경계로 배타적인 권리를 암묵적으로 주장한다. 당신의 두 발은 땅을 밟고 있고, 당신의 몸은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당신이 어떤 시각에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있다 하더라도, 당신을 제외한 다른 그 누구도 당신과 같은 시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소유는 숙명이고, 이것은 거부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외부의 것들을 섭취하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호흡을 해야 하고, 음식을 구하고, 기온이나 바람과 같은 환경에 맞추기 위해 각종 유용한 것들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것들은 인간의 신체 외부에 놓여 있다. 햇볕이나 공기처럼 풍족하게 주어진 것들도 있지만, 어떤 종류의 유용한 것들은 희소(scarcity)하다. 가령 사과가 그렇다.

자연 속에 던져진 한 외로운 인간 바바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산 속에서 우연히 사과를 하나 발견했다. 바바는 직관적으로 그것이 자신의 갈증과 배고픔을 해소시켜 주리라고 알고 있다. 그는 얼른 달려가 허리를 굽혀 오른 손으로 사과를 집어 들어 흙을 잘 닦아 낸 뒤에 입 속에 넣었다. 그렇게 바바는 사과를 소유했고, 섭취했으며 그래서 바바는 즉각적으로 만족하였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바바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맨 이유는 물론 배가 고팠기 때문인데, 바바는 배가 고플 때마다 항상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배가 고프지만 때때로 움막을 수리하기도 하고, 허기를 참고 그냥 잠을 청할 때도 있으며,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미래를 위해 먹을 거리 – 사과나 염소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바바는 굳이 먹을 것을 찾아 나섰는데, 그것은 낮잠이나 수리, 청소나 기도 등 여러가지 ‘선택들’ 중에서 그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바바는 항상 판단한다. 바바는 여러 선택들의 가치를 판단하고, 경중을 따지며 그 중 가장 다급하다고 여겨지는 하나를 선택한 뒤, 다른 나머지들을 포기해 버린다. 안 된 일이지만, 여러 선택들의 동시 다발적인 만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바바는 잘 이해하고 있다. 잠을 자면서 배도 채우고 싶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산 속의 염소를 사냥하면서 비가 새는 지붕을 고칠 수도 없다. 제한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 무엇보다 충분치 못한 사과는 바바에게 던져진, 거부될 수 없는 삶의 조건들이다. 이런 물리적 조건들은 바바로 하여금 선택(choice)을 하게 만드는데, 선택에는 반드시 가치 판단(valuation)이 선행한다.

바바는 여러 욕망(desire)들로부터 비롯된 다양한 선택들을 한 줄로 세우고, 특정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 가치들은 과감하게 포기해 버린다. 여러 욕망들을 전부다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하나의 가치가 겉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행동(action)이 된다. 인간은 행동하는 존재인데, 인간 행동을 다시 뒤집으면 선택, 가치판단, 여러 선택지 그리고 욕망이 차례로 쏟아진다. 인간 행동에 선행한 그 나머지들은 1.욕망과 그 욕망을 채워줄 재화의 2.희소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조건들 아래에서 연역되는 사실들이다. 욕망, 선택지, 가치판단, 선택, 행동은 그래서 인간에 관해 설명하고,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는 철학의 주요한 기초들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로,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특질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규정할 것이다. 바바가 산 속의 사과를 수확하면서, 그것이 더위가 끝나고 추위가 시작되기 전에 가장 만족스러운 형태로 변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면, 그와 같은 ‘지식’은 바바가 자신의 팔과 다리를 이용하듯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바바의 소중한 자산이다. 바바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 학습한 것들, 다시 말해 욕망과 욕망 충족 사이에 놓여있는 인과 관계들에 대한 추론이나 예측에 필요한 지식들을 얼마든지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가령, 허리까지 오는 작은 울타리를 치면 염소들이 도망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면, 바바는 그 경험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염소들을 가둬놓고 필요할 때마다 이전보다 획기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사냥을 대신할 수 있다. 울타리로 인해 추가된 바바의 시간과 노력은, 이전에는 포기했었던 다른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이용될 것이다. 바바는 남는 시간에 땔감을 구하거나 옷을 수선할 수도 있고 어쩌면 휴식을 즐길 수도 있다.

  1. 소유

바바는 산속에서 획득한 사과를 먹을 권리가 있는데, 사과에 대한 바바의 그런 권리가 바로 ‘소유권’이다.

사과가 바바의 눈에 띄기 전까지 사과는 주인이 없는 물건이었다. 바바가 그의 두 눈으로 사과를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의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해 주리라는 지식, 즉, 사과와 당면한 욕망 충족과의 인과 관계에 대한 인식이 있은 뒤, 자신의 의지를 작동시켜 다리, 허리, 팔, 턱, 여러 근육과 각종 신체 장기 등을 움직인 다음에 사과는 비로소 그의 ‘소유물’이 되었다. 이처럼 사과의 소유권리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유권리는 외부의 유용한 것들에 자신의 노동을 혼합하여 가치를 생산한 순간 생성된다.

“주인이 없는 물건에 노동을 가하여 가치를 만들면 그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 취득의 원리

‘취득의 원리’가 왜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유도되는지 다시 한번 알아보자.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식물처럼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생각하고, 행동하며, 의지를 가지고 있고, 원인과 결과에 대해 추론 하는 특별한 동물이다. 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리는 단순히 육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를 그답게 만드는 무형의 성격, 아이디어, 용기, 비겁함, 의지, 인내력, 게으름, 질투심, 순발력, 지구력, 현명함, 멍청함 등 모든 정신적 특질들을 포함할 것이다. 팔과 다리는 나의 것이지만 아이디어나 강한 정신력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고, 용기는 나의 것이지만 두려움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행동은 정신적이고 동시에 육체적인 활동이므로 한 인간의 행동을 둘러싼 권리는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으로부터 합리적으로 유도되고, 그래서 인간 행동에 대한 부정은 인간에 대한 부정으로 연역된다. 사과가 왜 바바의 것일 수 밖에 없는지 다른 각도에서 살펴 보자.

바바는 ‘어떤 땅’에서 ‘어떤 종류의 감자’ 하나를 심으면 얼마 후 수 많은 감자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산 속을 돌아다니던 바바는 자신이 노동하기에 적당한 크기의 그 어떤 땅을 발견하고 감자를 심을 준비를 하였다. 하루 동안 바바는 돌을 치우고, 흙을 고르고, 물길을 내고, 잡풀을 뽑는 등 땅을 정리하여 씨감자를 뿌릴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바바는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이른 새벽 한스가 그 땅을 발견했다. 한스가 생각하기에 그 땅은 새 집을 짓고 살기에 적당했다. 한스는 그 땅에 집을 짓기 위해 기초공사를 하였는데, 집을 받칠 큰 나무와 돌을 옮기고 필요한 흙을 한 곳에 쌓아 놓았다. 하루 치의 일을 마친 한스는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땅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을까?

자연법은 땅의 소유권이 바바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감자 밭을 일구기 위한 바바의 행동은, 그가 사과를 취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인이 없는 물건에 노동을 혼합시켜 가치를 발생시키는 과정이었다. 토지에 혼합된 것은 감자 농사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 의지, 물리력, 시간 등이고 그것들은 앞서 말했듯이 바바라는 인간의 소유물인 동시에 바바를 규정하는 특징들이다. 그래서 바바가 감자 밭에서 힘들게 노동하고 난 뒤에, 바바의 그것들은 토지와 혼합되어 분리되기 힘든 상태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한스의 주택 건축 노동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한스의 노동은 먼저 바바의 노동을 무화(無化)시켰다. 한스의 주택공사로 감자 밭이 사라질 때, 감자 밭에 혼합되어 있던 바바의 노동과 아이디어, 바바의 기대와 의지,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함에서 비롯된 바바의 모든 드러난 행동들은 한스에 의해 부정되었다. 한스가 어떤 가치를 발생시키기에 앞서 한스는 바바의 행동을 전부다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한스는 단순히 감자밭을 훼손한 것이 아니다. 한스는, 하루 전 감자 밭에 녹아 들어간 바바의 것들을 전부다 취소시켰다. 한스의 노동은 감자밭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바바라는 인간에 대한 부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약 한스의 노동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그렇다면 한스가 다녀간 그 다음날 바바는 다시 감자밭을 일구고, 다음 날 한스는 다시 집을 짓고, 그런 취소의 과정은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다. 어쩌면 로빈슨이 와서 땅에 구멍을 내고 우물을 팔 지도 모른다.

먼저 차지한 사람이 그것의 주인이라는 인식은 자생적으로 진화된 경험적 질서인 동시에, 인간 행동에 관한 탐구로부터 선험적으로 유도되는 자연권이다.

인간이 땅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땅이 공기처럼 충분히 많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스와 바바가 땅의 소유권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까닭은 욕망과 희소성이라는 숙명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사적 소유권에 대한 어떤 이율 배반적인 도적감정을 진화시켜 왔든지에 상관없이, 인간은 외부의 쓸모있는 유무형의 것들을 배타적으로 소유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다.

한 가지 축복인 사실은, 소유권리가 단단해진 뒤로 인간의 물질적 수준이 폭발적으로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소유가 생긴 뒤 ‘교환’이 비로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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